kor
Nashville TN USA Sung Shin Episcopal Church Nashville TN USA Sung Shin Episcopal Church Nashville TN USA Sung Shin Episcopal Church Nashville TN USA Sung Shin Episcopal Church

내쉬빌 한인 성신 교회

5325 Nolensville Pike
Nashville, Tennessee USA
37211
+1 (615) 333-9979

문신규 목사

카테고리 목록

이민 안내 보기
건강 안내 보기
진학 안내 보기
간증 보기
기타 보기
찬양 보기
성경 보기
건국 60년 ‘한국의 상징’ 릴레이 인터뷰 소설가 박경리
Jul 20, 2008 08:07 PM 기타 에서

“전쟁보다 무서운 것은 물밑 지식인 싸움” [조인스] 한국 역사에서 지식인은 정치인보다 더 해악적 존재… 좌파정권 10년 통해 국민 비판의 눈 키워  

 
▶박경리는…
1926년 경남 통영 출생.
1946년 진주여고 졸업.
평화신문·서울신문·경향신문 기자.
1955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계산>으로 등단. 
1959년 <표류도>, 1962년 <김약국의 딸들>, 1964년 <파시> <시장과 전장> 등 장편소설 발표. 1969년부터 1994년까지 <토지> 집필.
 
 
<토지>의 작가 박경리. <월간중앙> ‘한국의 상징’ 서베이(2월호)에서 오피니언리더 100인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으로 백남준에 이어 박경리를 꼽았다. 생존자 중에서는 1위다. 여간해서는 매스컴의 인터뷰에 나서지 않던 박경리 선생도 이번만큼은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
1987년 경남 하동의 한가운데서 시작해 간도와 일본을 거쳐 8·15 광복으로 이어지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82). 원고지 3만1,200장 분량으로 근세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엮어낸 이 소설로 그는 한국문학사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1955년 등단한 이래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원칙을 고수해온 박경리 선생은 여간해서는 매스컴 인터뷰에 나서지 않는다. 낯가림이 심한 탓이다. 이번 인터뷰 역시 큰 기대를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과거 여러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 내려오라는 전갈이 왔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위치한 토지문화관으로 향하며 내내 궁금했다. 좀처럼 세상 출입을 않는 노(老)작가가 흔쾌히 인터뷰에 응한 이유가-.

오봉산 기슭에 자리 잡은 토지문화관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40분. 토지문화관 측은 관장실로 안내하며 약속 시간에 맞춰 박경리 선생이 내려오실 것이라고 했다. 관장실에서 무료하게 기다리느니 토지문화관과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위치한 선생의 자택 앞에서 노(老)작가를 맞이하기로 했다.

2시 정각, 선생이 자택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진분홍 외투와 스카프로 단아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었지만, 세월의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 부축 없이는 혼자 현관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할 정도였다. 

힘들게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내려오는 선생에게 다가가 관장실이 아닌 자택에서 인터뷰하자고 말을 건넸다. 한참을 망설이던 선생은 ‘거실 한쪽 귀퉁이에서만’을 조건으로 기자와 사진기자를 자택으로 들였다.

몇 년 전 자택에서 촬영한 모 방송국 인터뷰가 나간 뒤 훔쳐갈 것도 없는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했다. 이후 자택에서는 일절 매스컴과의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고 망설인 이유를 설명했다. 자택 거실에 들어선 선생은 “간수를 잘 못해 고향에서 가져온 생선을 먹고 체해 한 달간 고생했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을까 회의하기도”

- 그렇잖아도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체하지 않았어도 건강할 수 없는 나이지. 나이를 생각하면 너무 오래 살았고.”

- 10년 이상은 더 사셔야죠. 텃밭을 직접 가꾸신다고 들었는데, 요즘도 텃밭을 가꾸시나요?
“지금은 겨울이라 안 하지. 겨울이 아니어도 이제 체력이 달려 일 못해요. 사람들이 나 대신 해.”

- 그러면 책을 읽으며 소일하시겠군요?
“아이고. 그런 것도 못해요. 아파서. 토지문화관 일 말고는 별다른 일 안 하고 지내요. 사람이 활력이 있어야 움직이는데, 활력이 없으니까. 또 문화관 일도 바쁘고.”

- 토지문화관 일을 직접 보시나 봐요?
“그럼요. 결재도 다 제가 하죠. 반찬도 다 만들어 내가고.”

- 반찬을요? 매일 반찬을 내간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닐 텐데요?
“그럼요.(웃음) 하루 이틀이 아니라 1년을 해야 하니 작은 일은 아니죠. 하다못해 된장·고추장·젓갈을 담그는 것도…. 하루에 반찬 두어 가지씩 하죠.”

- 지난해부터 가족에 관한 글을 새로 쓰기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진전이 있습니까? 언제쯤 읽을 수 있을까요?
“쓰고는 있지만, 젊을 때처럼 야망이 없어요. 이제는 빨리 완성해 사람들한테 평가를 받겠다거나 하는 욕망도 없고. 그러니 서서히 하고 있는 것이지. 말하자면 굉장히 순수한 것이고.”

- 많이 쓰셨나요?
“바쁘게는 못해요. 어떤 때는 흥미가 있다가도, 어떤 때는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회의에도 빠지기도 하고…. 인생 자체가 늘 그렇지 않나요? 결론이 없잖아요? 결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강대강 간다고 해도 되돌아보면 제대로 온 것 같지도 않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생과 사가 전부 모호한 것이지. 명확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나비야 청산 가자> 의욕이 앞서 아쉬워”

 
 
본격적으로 인터뷰가 시작되자 선생은 슬며시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요즘도 담배를 많이 피우시느냐는 물음에 “거의 안 피우는데 말할 때는 답답해 조금 피운다”고 했다.

- 2003년 <토지>탈고 후 9년 만에 의욕적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3회로 중단하신 <나비야 청산 가자>를 지난해 미완의 상태로 엮어 내셨습니다. 작가들이 미완성 소설을 책으로 묶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인데, <나비야 청산 가자>는 영원히 접으신 것인가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내가 그것을 쓰면서 혈압이 굉장히 올랐어. 이제 체력이 받쳐 주지 못해. 소설이라는 것은 굉장히 복잡해요. 복합적인 것이죠. 직물로 치면 단순히 그냥 짜 가는 것이 아니거든요. 서론, 본론, 결론의 모양이 다 있는 것이지. 그것을 이제 머리가 당할 수 없는 것이지. 그러니까 혈압이 오르고.”

-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중간에 끊겨 너무 아쉽습니다.
“나도 그래요. <토지>의 후속처럼 쓰려고 했던 것인데 내가 욕심이 너무 컸어. 후속이라도 단순히 후속이 아니라, <토지>가 한민족의 전반적 이야기를 다뤘다면 <나비야 청산 가자>는 그 중에서도 지식인들에 대한 부분만 따로 떼어내 그려 보려고 했거든. 그게 방대한 것이지. 또, 사회 구조상 건드리기가 너무 어렵게 돼 있어.”

- 미쳐 못 쓰신 부분에는 어떤 내용을 담고자 하셨나요?
“해방 이후 지식인사회를 제대로 다뤄 보고 싶었지. 한국의 지식인사회는 다른 나라와 사정이 다르거든.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이데올로기 문제로 갈라서서 전쟁을 경험했고, 또 정치적 배경에 따라 탄생한 지식인도 가지각색이지. 반체제 운동도 있었고, 또 그 실패를 눈 앞에서 보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해방 후 우리의 지식인들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확립하지 못 했어. 박해까지는 아니지만 시대적·정치적 상황 속에서 명확하지 않은 모습을 취했고. 반대로 이념에 치우쳤던 사람들은 또 지나치게 명확해서 소위 공산주의 외에는 용납하지 않는 완강함이 있었지. 거기서 나오는 피해가 또 있고…. 이런 이야기를 담아 보려고 했지.”

-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 그렇게 취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여건, 즉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 의사를 발표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었지. 진실을 말하지 못할 상황이….”

- 그런 이야기를 <나비야 청산 가자>에서 어떤 인물을 통해 보여주실 계획이셨나요?
“인물 몇몇이 끌고 나가는 상황은 아니고, 많은 지식인이 끌고 나가는 것이지. 몇 사람의 비극적 생애가 소설의 일부분은 성립하겠지만, 강력하게 끌고 나가는 것은 아니고. 또 사건을 연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도 많고. 지금까지 쓴 것은 초입의 아주 일부분밖에 안 돼요. 그러니까 내가 건드리기 힘들지. 치고 들어간다면 아주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져왔을 거야. 나는 지식인에 대한 불신이 커요. 흔히 정치인이 나쁘다고 하는데 나는 정치인보다 지식인을 더 부정적으로 보거든. ‘따다다’ 총 쏘고 싸우는 전쟁보다 더 치열한 것이 물 밑 지식인들의 의식싸움이야. 그런데 민족주의니 사회주의니 갈라서서 이데올로기 외에는 용납하지 않는 지식인의 분열적 요소도 문제지만, 차라리 그것은 선명해서 나아요. 이런 선명한 지식인보다 회색 지식인이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문제지.”

-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종식된 오늘날에도 그렇다고 보시나요?
“그럼요. 왜냐하면, 사회주의니 민족주의니를 떠받들고 있는 것이 회색적 요소거든. 사회가 흘러가고 꿈틀거리고 움직이는 데도 그런 요소가 많이 들어가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어쩔 수 없는 방편이기도 하죠. 하지만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냐, 목숨을 건 진실이냐의 문제로 나눠 볼 수도 있지. 그런데 목숨을 건 진실이 오늘날 같은 사회에서 용납이 안 되는 것이지. (지식인) 스스로도 그 길을 택하려 하지 않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해. 역사적으로 봐도 어쩌다 이순신 같은 인물이 나와 사회를 구제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고 거의 지식인들은 기회적인 사람들 아닌가 싶어요. 공산주의만 해도 결과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하기보다 그네들을 이용한 정치적 집단으로 전락했잖아요? 때문에 (노동자와 농민은) 똑같이 피해만 받았죠. 그런 뜻에서 영원히 혁명은 없는 것이지. 반체제 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에 한 번은 학생 지도자라는 사람이 나를 찾아왔기에 ‘너희가 스스로 권위주위를 없애기 위해 나왔는데, 너희가 또 권위주의가 되고 있지 않으냐? 그러면 혁명은 언제 있을 것이냐’고 한마디 한 적이 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소위 좌파 정권이 집권했지만, 절대로 권위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거든. 오히려 강화했죠. 결국 지식인이 그때그때 따라서 외치는 것도 양두구육(羊頭狗肉)인 것이죠. 그래서 10년도 못 가 무너진 것이고. 그래서 또 바꿔 보는 것인데, 그것도 봐야 알죠. 시간이 가면서 어떻게 변할런가.”

- 그렇다면 오늘날 지식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오늘날 진정한 지식인이 있나요? 없어요. 제가 볼 때는 그래요. 극도로 기술화한 지식만 있지. 진리에 대한 애정이나 정열 같은 것은 없다고 봅니다. 오늘날 정치인들도 정치를 통해 자기 이상을 구현하기보다 출세 또는 더 나은 삶의 조건을 획득하기 위해 하는 것 아닌가요? 이런 사고방식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추세라고 봐요. 자본주의의 잔재이고요.”

“10년 좌파 정권 통해 국민 비판의 눈 키워”

- 2008년은 건국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맞은 셈인데, 대한민국의 지난 60년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지난 60년의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보시나요?
“나는 우리가 크게 세 가지 사건을 통해 교훈을 얻었다고 봐요. 첫째가 6·25전쟁이에요. 6·25전쟁 당시 사회주의와 소위 민족주의 혹은 자본주의가 머리가 터지게 싸우는 현장을 목도했거든요. 거기에서는 일단 흑과 백이 정해지면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용납이 안 돼요. 뭐 사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흑이냐 백이냐 하는 것으로만 다투는 것이지. 그 결과 전쟁이라는 비참함 속에서 무지한 국민이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했죠. 그 참상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죠. 두 번째로 우리 국민은 이승만 박사의 독재 하에서 일어난 4·19와 그 다음 일어난 5·16을 통해 많은 교훈을 얻었죠.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지난 10년 좌파 정권이 나타남으로써 국민이 비판할 눈을 갖추게 됐죠. 이것이 지난 60년 동안 우리 민족이 고생하고 또 몸으로 겪고 하면서 얻은 하나의 판단이자 교훈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 지난 10년 좌파 정권을 통해 국민이 비판할 눈을 갖추게 됐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정치라는 가장 불순한 것이 부각된 것이라고, 가장 큰 잘못이었다고 생각해요. 정치를 위해서는 어떠한 것도 합리화하는 상황을 국민한테 강요했죠. 국민이 그에 대해 반항한 것이고요. 어느 지도자든 표밭만 생각했거든요. 여기에서 표가 얼마나 나오느냐만 생각해서는 (정치가) 제대로 될 수 없죠. 그런 것을 국민이 깨달았어요. 현실적으로 볼 때 오늘날에는 국민이 앞서가고 정치가들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어요. 환경문제만 봐도 그렇죠. 이제 컴퓨터와 인터넷 등이 발달하면서 국민이 알고 싶은 것을 전부 알 수 있거든요.”

인터뷰가 길어지자 선생은 한 문장을 끝낼 때마다 한 번씩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타 들어가는 담배는 끊어질 줄 몰랐다.

-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장래는 어떻게 보시나요? 낙관적입니까, 비관적입니까?
“나는 세계적으로는 비관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비관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우리가 앞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각보다 인간이라는 자각을 해야 해요. 지식인이든 일반인이든 마찬가지죠. 우리가 생각하기에 지구가 굉장히 큰 것 같지만, 우주 속의 지구는 아주 작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지구는 갈수록 점점 작아지고 있죠.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즉각 알 수 있잖아요? 이 작아지는 지구에서 분열이 생기면 그만큼 위험도 커집니다. 그렇잖아도 지구가 작아졌는데, 이것이 또 몇 조각으로 갈리면 살 수 있겠어요? 특히, 이제 환경문제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때문에 나는 누가 고향이 어디이니 무슨 이야기를 해달라고 할 때마다 ‘작가는 여하한 경우에도 세계인의 한 사람이다. 어떤 지역의 작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요. 언제든 우리는 인간인 것이죠. 너와 나를 강력하게 갈라 놓으면 거기에는 어떤 진실도 없어져요. 지구가 작아지고 가까워진 오늘날 자본주의다 뭐다 해서 돈싸움을 하는 것은 자멸하는 길이죠.”

선생은 화제를 지식인에서 근래 관심을 쏟고 있는 생명과 환경 문제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 청계천 살리기가 토지문화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계천을 살리자는 조그마한 모임이 있었어요. 그 모임 세미나를 토지문화관에서 두어 번 했죠. 그때만 해도 이것이 될지, 된다면 10년 후 혹은 20년 후에나 가능할지 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 정보를 이명박 씨가 잡은 것이죠. 운수가 좋았죠.”

- 선생님께서 처음 청계천 살리기를 시작하셨을 때 생각했던 청계천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나는 처음부터 서울시 차원에서 복원하는 것을 반대했어요. 국가 차원에서 몇 조 원 내서 아주 본격적으로, 근본적으로 하라고 했죠. 그런데 정부에서는 관심이 없었지. 그러니까 이명박 씨로서는 할 수 없잖아요? 3,500억 원 정도 가지고 그 이상 뭘 어떻게 해.”

- 지금의 결과에 그럭저럭 만족하신다는 뜻인가요?
“에휴. 만족하겠어요?(웃음) 만족할 수 없지. 그래도 그 정도라도 해서 결과적으로는 생태계가 살아났으니 좋기는 한데, 내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 비교하면 규모로 볼 때는 몇 분의 일밖에 안 돼. 그것이 어려운 점도 있어요. 내가 생각했던 청계천 복원은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는데, 지금 서 있는 빌딩을 없앨 수는 없잖아.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두고두고 해야 할 일이야. 자연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잖아? 인간과 세월과 자연이 합쳐져야 만들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힘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단시일에 되는 것도 아니고…. 인내를 갖고 길게 내다봐야 해요.”

청계천 복원운동 토지문화관에서 태동

- 청계천 살리기에 앞장섰던 이명박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세운 한반도대운하 건설에 대해 환경단체들은 생태계가 훼손된다면서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반도대운하 건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 잘 모르겠고, 또 그것이 아직 결정되지도 않은 것이니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지. 하지만 나는 물류를 위한 운하라면 절대 반대해요. 우리 국토가 결딴나고 만신창이가 돼요. 그러나 나는 물길은 원해요. 세계에서 물전쟁이 시작되고 있거든요. 석유는 고갈돼도 인간이 살 수 있지만, 물이 고갈되면 생명은 다 죽습니다. 우리나라도 길게 보고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런 차원에서 물 저장을 위한 물길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죠. 지금은 비가 오면 물을 그냥 흘려 보내잖아요? 물을 흐르게 하면서 저장하는 것이 댐에 가두는 것보다 생태적인 방법이고요. 또 강처럼 물이 흐를 수 있는 물길을 만들면 생태계도 복원할 수 있어요. 조그만 청계천으로도 서울의 기온이 달라지고 공기오염 정도가 달라졌다고 하잖아요? 또 하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인데, 물길을 만들면 그것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세계적 관광 추세가 특이한 볼거리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 좋은 데를 찾아 가는 것이잖아요?”

한국을 대표해 세계에 알리고 싶은 문인 1위로 꼽히는 작가 박경리는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해방되던 해 진주여고를 졸업했다. 6·25전쟁 와중에 남편을 잃고 외동딸을 키우며 살던 그는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64년 발표한 <시장과 전장>은 그의 자전적 작품. <시장과 전장>에 등장하는 황해도 연백의 연안여고 선생 ‘남지영’의 모델이 바로 박경리 선생 자신이고, ‘차기석’의 모델은 1·4후퇴 때 실종된 선생의 남편이다.

1969년 대표작이 된 <토지> 1부 연재를 시작한 선생은 그 후 25년간 세상과의 차단 속에서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했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빙벽에 걸린 자유, 주술에 걸린 죄인’의 세월이었다.

- <월간중앙>이 건국 60주년을 맞아 오피니언리더 100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서베이에서 한국의 문화·예술을 상징하는 대표 인물로 꼽히셨습니다. 오피니언리더들이 왜 선생님을 꼽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내가 상징적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문학 자체를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생존보다 강한 것은 없거든요. 이데올로기도 원래는 생존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방 60년 동안 이데올로기가 생존을 무시했어요. 나는 이데올로기든 경제든 사회·정치제도든 그 어떤 것도 생존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고 봐요. 모두 생존을 위한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나는 문학지상주의를 반대해요. 문학도 풀지 못한 삶의 수수께끼를 풀어 보자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죠. 문학을 위해 인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있기 때문에 문학이 있는 것입니다.”

- 무려 25년간 <토지> 집필에 매달리셨는데, 그렇다면 선생님께 <토지>는 무엇인가요?
“나는 설명을 부여하고 싶지 않지만, 토지는 모든 생명의 흐름이에요. 강 같이 흐르는…. 그런 측면에서 <토지>는 인물이 더 많이 나와도 괜찮았어요. 나는 몇 명이 나왔는지 사실 기억도 못해. 세어 보지도 않았고. 그런데 조사해 본 사람들이 600명이다, 700명이다 하는 것이죠. 조금 유례가 없는 일이겠죠? 한 인간의 비극이 아니라 이 집단적 생명 자체가 뭉뚱그려진 숙명을 그리려고 했어요. 그것은 주어진 축복일 수도 있고, 저주일 수도 있죠. 내가 가장 큰 뜻을 두었던 것은 ‘토지’라는 제목입니다. 우리는 흔히 토지라고 하면 관념상 토지문서를 생각해요. 토지문서는 다시 말하면 소유를 위한 서류거든요. 인간이 유목생활을 하다 땅에 발을 디디고 살게 되면서 소위 자본주의가 시작됩니다. 사유재산이 시작되는 것이죠. 즉, 토지는 인간의 욕망이 실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죠.”

- 600여 명의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주갑이!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자연에 가깝기 때문이지. 무심히 시작한 인물인데, 나중에 보니 그렇더라고. 길상이는 처음부터 욕심이 많았던 인물인데, 욕심을 부려서 그런지 실패했고.”

- 선생님께서 애초 만들고 싶었던 길상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나요?
“좀더 강렬하게 만들고 싶었는데, 약해요. 반듯하기는 한데 인간적 느낌이랄까 이런 것이 약해.”

- 선생님을 닮은 인물은 없나요?
“없어. 나 닮은 사람도 없고, 등장인물 중 누구도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해서 쓴 사람은 없어요. 사람들은 서희를 나라고 하는데, 서희의 어떤 요소 중 나를 닮은 것도 있겠지. 하지만 등장인물 모두에게 조금씩 내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이지, 그것이 서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야.”

 
▶텍스트
 

이데올로기·문학은 생존을 능가하지 못해

- 서희의 어떤 부분이 선생님과 비슷하다고 보시는데요?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일 뿐이지, 쓰면서 그런 것을 생각하지는 않으니 나는 모르겠어. 쓸 때는 인물의 성격 하나만 추구했으니까. 나랑 닮은 사람 없어요.”

- 소설을 끝내 놓고 간도를 방문하신 것으로 압니다. 한 번도 밟아 보신 적이 없는 용정촌을 어떻게 그렇게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었습니까?
“그게 나도 참 불가사의해. 완전 생짜는 아니고, 기후 관계나 지리 등에서 용정 사정을 상세히 적은 자료를 참고하기는 했지. 그렇지만, 결국은 작가의 상상력이지. 우연인지 모르지만 하동도 한 번도 안 가 보고 썼는데, 다 쓰고 보니 하동에도 진짜 그런 집이 있다고 하더라고. 연못도 있다고 하고.”

-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상상력으로만 쓰신 것인가요?
“몰랐죠. 전혀 모르고, 가 보지도 않고 썼죠. 용정도 마찬가지고. 그게 뭐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하하하…. 설명이 안 되는 것이지.”

박경리 선생은 문학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하면서도 <토지> 이야기가 나오자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 혹시 천재이신가요?
“아니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소설가 중에는 굉장히 실증을 중요시하는 사람도 있어요. 실제로 다 가 보고, 조사해 보고 하면서 글을 쓰는…. 나는 그러라면 못 써요. 나는 상상력이 없는 글은 생각할 수 없거든. 아무것도 없는 속에서 내 상상을 가지고 치고 올라와야지. 이것 치우고, 저것 치우고…. 나는 그렇게는 못해. 내 방식은 그래. 나는 여행도 거의 안 했어요. 앉아서 머리 속에서 하는 것이지.”

- 선생님의 상상력의 근원은 어디서 오는 것이죠? 해외여행은커녕 서울 나들이도 거의 안 하시고 원주에만 틀어박혀 지내시는 것으로 아는데.
“그러니까 상상력이지.(웃음) 많은 독서가 밑거름이 됐겠죠. 다리 하나만 묘사하려고 해도 독서를 통해 내 머리 속에 저장된 다리 양식이 여러 가지가 있어요. 글을 쓸 때 그 중에서 택일하는 것이지. 무에서 유가 있을 수는 없거든. 결국 상상력을 만들어 내는 것은 끊임없는 독서 같아. 쌓여 있는 독서의 양에 따라 상상력이 자유로울 수도 있고 모자랄 수도 있지.”

- 여고 시절 엄청난 독서광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독서광이었지. 무엇이든 손에 들어오는 대로 다 읽었으니까. 누구한테 하루 동안만 빌린 책 세 권을 다 보려고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고. 독서 범위도 굉장히 광범했지. 하다못해 천문학에도 관심이 있어서 천문학 책도 찾아봤으니까. 세계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책을 읽는다는 것이 내게는 배가 고파 음식을 먹는 것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렇게 읽은 것이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 것 같아.”

- 그렇게 읽으신 책 가운데 내 인생의 책이라고 꼽을 만한 책이 있습니까?
“누구 것이 좋다 이런 것은 없고, 다만 내가 조금 영향을 받았다면 도스토옙스키가 있죠. 도스토옙스키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 집념이 아주 넌더리가 나 이가 갈릴 정도로 집념이 가득 찬 사람이거든. 나는 그를 어떤 면에서는 좋아하기는커녕 혐오하기까지 하는데도 그 사람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또 영향은 안 받지만 좋아하는 작가에는 <그대 고향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리>를 쓴 미국 작가 토머스 울프가 있어요.”

- 국내 작가 중에는 영향을 받았다거나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없나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거의 몰라요. 거의 읽은 것이 없거든요.”

- 일부러 안 읽으셨나요?
“해방될 때까지는 한글을 몰랐어요. 일제 강점기 때 한글을 금지했기 때문에. 우리가 아주 첨예한 시대를 살았지.”

- 그럼 한글을 처음 배우신 것이 언제인가요?
“학교에서 배운 적은 없어요. 여고 시절 <신천지>라는 잡지를 읽기는 읽었는데, 그것도 접속사만 한글이고 나머지는 다 한자였으니까 읽었던 것이지.”

- 한글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럼 해방 이후인가요?
“그렇죠.”

- <토지>에 쓰인 수많은 토속적 단어와 표현을 생각하면 한글을 스무 살이 넘어서야 읽기 시작하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네요.
“완전히 생짜죠. 어디 책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내 생활 주변에서 가져온 것이거든. 내가 한글로 글을 쓴 것이 거의 서른 살이 다 돼서입니다. 그런데 글자란 것은 하나의 중계 역할을 하는 것이지, 그 사실 자체는 아니거든요. 내가 글을 쓰려고 했을 때 일본어와 한글은 별 차이가 없었어요. 굳이 도움이 됐던 것을 찾자면, 내가 시골 태생이라는 것, 그것도 이순신이 나온 통영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 또 민란이 수도 없이 일어난 진주에서 공부했다는 것이지. 이 두 도시가 다 반골이고, 일본에 저항했던 곳이거든. 그 영향이 굉장히 크죠.”

해방 때까지 한글 몰라

 
 
- 통영이 고향인데 왜 원주에 정착하셨나요?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으시고요?
“딸 때문이었죠. 내가 서울에서 손주를 기르다 딸이 원주 시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지. 남편(김지하)도 없이 시집살이하는 딸 아이의 울타리가 돼 주려고 내려온 것이지. 그랬던 것이 애들은 전부 (원주를) 떠나고 나만 남은 것이야.”

선생의 사위는 <오적>의 시인 김지하다. 그러나 선생은 애써 사위에 대한 이야기는 피하려 했다.

- 따님과 손주들은 자주 내려오나요?
“자주 못 와요. 요즘 생활이 다 그렇잖아요. 나도 원하지 않고. 여기 일들 많은데, 오면 도와주기는커녕 더 힘들어.”

- 김지하 선생의 율려사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유. 나는 율려니 그런 거 몰라요. 그거 내가…. 당장 밖에 나가면 손에 잡히는 것이 푸른 색, 푸른 생명인데 여기에 자꾸 말을 만들어 붙이고는, 그게 사상이다 진리다 하는 것이 다 지식인의 폐단이지. 철학은 다 자연에 있어요. 지식인의 결함이 뭔지 알아요? 간단명료한 진리에 자꾸 덧붙이는 것이야. 쓸데없는 것 붙이고, 또 붙이는 것이지. 그러면서 진리와 자꾸 멀어져 가는 거예요.”

사위인 김지하 선생 이름만 나오면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급히 화제를 돌렸다.

- 세상 나들이를 도통 안 하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럼에도 선생님의 글은 요즘 젊은 작가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감각을 보여주시는데요. 세상에 대한 정보는 무엇을 통해 얻으시는지요?
“통로는 역시 자연뿐이지. 인간의 입을 통해 오는 것은 모두 덧붙여지고 왜곡돼 있어요. 그러나 자연은 바로 내 심장을 뚫고 들어와요.”

- 인터넷은 이용하시나요?
“그런 것 안 해요. 나는 컴퓨터를 안 써요. 내가 없는 것이 세 가지인데, 우선 컴퓨터가 없고
초록색 배경은 하나님 나라의 계절 대표색깔 입니다

Jay Johnston, Christi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