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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제수이트)의 잔학행위와 세계지배- A.I.C
Jul 19, 2008 08:07 PM 성경 에서

종교 개혁을 박멸시키기 위해 원래 바티칸이 제정(포르투갈/스페인, 1534)

1773년 7월 21일 교황 클레먼트 4세 교단 억압(이 때문에 즉시 독살)

1814년 그 칙령을 수행할 목적으로 'Verona 비밀 조약'으로 개명

1822년 10월 이 칙령에 대해 계약 당사자 최종 비준.

이에 따라 제임스 몬로 대통령은 토마스 제퍼슨의 도움을 받아 그 존재를 확인하고 몬로 독트린 제정. (상원 의회 기록: 1916년 4월 25일 1차 회기 64차 의회 기록 Vol. 53, Part 7, Page 6781)

전 예수회(제수이트) 사제 알베르토 리베라 박사님(Dr. Alberto Romero Rivera)에게 이 글을 바친다(이 글은 그의 생애에서 영감을 받음).

*(알베르토 씨리즈 참조 - 생명의 서신 출판, 인터넷 참조)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태복음 7:15)


필자는 몇 해 전에 어떤 책을 읽고 탐구를 시작해서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내가 얻은 정보를 심판에 부친다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너무나 확실해서 바티칸의 범죄자 자신들도 부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는 과거 잔학 행위에 대한 말이 나오면 그 사람들은 "우리는 이제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비웃거나 글쓴이에 대해 편협하고 관용스럽지 못하다고 몹시 비난하면서 그 추종자들에게 "우리는 그런 입장을 절대로 바꾸지 못하겠다"고 말했었다.

독자들이 필자를 '극단주의자'라고 생각하기 앞서 먼저 이 정보를 얻은 사람일 뿐이란 점을 말해 두겠다. 조금만 시간을 들여 조사해 보면 이 정보는 누구나 얻을 수 있다(인터넷에서 바로 손 끝에 수 있기 때문).

정부 부서가 수행하거나 범하고 있는 사건들은 대부분(전부는 아님) 미국 국민들의 권리와 자유에 전적으로 부정적이다. 정부는 전세계에서 수백만 인명을 대량 학살한 데 대해 책임이 있다. 이 미국이란 나라의 건국으로 이어지게 된 '암흑 시대(종교 재판)' 시기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교황청과 영토확장


15세기는 새로운 영토 발견이란 열풍이 휩쓴 시기였다. 이를 처음 주도한 인물은 헨리(Henry) 왕자였다. 헨리는 1394년 포르투갈 국왕 요한 1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415년 아프리카의 쿼타(Ceuta) 도시를 포위 공격함으로써 용맹을 떨쳤으며, 그 이후 명성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그 시기 이후로는 미지의 나라를 찾아 해군 원정을 떠나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헨리가 이끄는 군함들은 아프리카 연해와 인근 섬들을 정복하여 포르투갈 영토에 귀속시켰다. Bojadoy봉을 정복한 다음에는 자신이 발견한 땅과 발견 예정인 땅을 모두 부왕과 그 계승자들에게 바치고 교황 마틴(Martin) 5세에게 그 헌사를 비준해 달라고 했다.

또한 포르투갈은 원정할 때마다 로마 카톨릭과 교황 권위의 확장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교황 마틴(Martin) 5세는 헨리 왕자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1430년경의 교황 비준 교서에서는 'Bojadoy봉에서 인도 전역에 이르는 땅 가운데 앞으로 발견되는 영토는 모두 포르투갈 영토에 속한다'라고 기술해 놓았다. 1433년 요한 1세가 서거하자 헨리 왕자의 형 에드워드가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했다. 교황 에우게네(Eugene) 4세는 1438년 에드워드에게 내린 교서에서 마틴 5세가 승인한 내용을 비준했다. 1454년 1월 8일 교황 니콜라스 5세는 전임 교황 마틴과 에우게네의 교서에 대해 언급하면서 헨리 왕자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25년 동안 매년 포르투갈 군대를 끊임없이 파병했다. 가장 신속히 이동하는 군함들을 이끌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며 남반부와 남극 방향의 해양과 해상 영토를 찾기에 공을 들였다. 그 군함들은 마침내 기니아 지방에 이르러 일부 도서와 부속 영공 및 해양을 차지했다. 그 이후 그 지역 주민들과 몇 년 동안 전쟁을 수행하여 많은 도서를 정복하거나 평화적으로 소유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인근 해역으로 귀속되어 있다. 또한 기니아 인과 그 밖의 니그로족을 강제로 데려오기도 했으며, 일부는 교환 형식으로 데려오기도 했다."

이 교서에서는 헨리에 대해 '진정한 그리스도(교황권) 병사임과 동시에 가장 용기 있는 신앙 수호자이자 불굴의 챔피언으로서, 전세계에 공포되어 격찬과 존경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지니게 해 달라고 젊은 시절부터 온힘을 다해 열망했다'고 기술했다. 이 교서에서는 위에서 말한 영토의 획득과 소유에 대해 포르투갈의 독점권을 인정했는데, 이는 교황 Martin과 Eugene의 여러 서한 덕분이었다.

곧 그 서한들에서는 포르투갈 국왕과 헨리 왕자에 대해 '기독교(로마 카톨릭)의 적이나 이교도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침략하고 색출하고 말살하고 정복할 수 있으며, 그 주민들을 영원한 노예 상태로 만들 수 있으며, 그 왕궁과 소유 재산을 모두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유롭고 충분한 권리가 있다'고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교황 니콜라스(Nicholas)도 역시 서한을 통해 '이미 획득한 영토이거나 획득할 영토에 대해서 공포하는 바, 영토가 일단 획득되어 귀속되었다면 위에서 말한 국왕과 그 계승자에게 영원히 귀속되며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는 귀속되지 않게 할 권한이 있다'고 했다. 또한 포르투갈이 발견한 영토에 기독교(로마 카톨릭) 국가가 정착하거나 포르투갈이 미지의 나라를 발견하고 정복하려는 데 방해를 한다면 가장 엄한 벌을 내린다고 했다. 이는 헨리 왕자의 계획과 실행이 '가장 경건하고 영원히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으며, 보편적 교회 공동체의 이해 관계가 관련된 하나님의 영광이 깃들어 있는 일'이었음을 말해 준다.

 

교황청 정복자와 노예들

 

이처럼 헨리 왕자의 계획과 작전은 당시 로마 카톨릭 왕국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권위의 재가를 받고 있었다. 너무나 경건한 곳에서 받은 권리였기에 논란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로마 교황은 왕자들을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지상의 왕국을 마음대로 허용해 줄 수 있었다. 교황 니콜라스가 승인한 내용은 1458년 8월 그 후계자 셀릭투스(Calixtus) 3세가 뒤이어 확정하게 되었다.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당시 미성년이었던 아들 알폰수스(Alphonsus)가 1438년 왕위를 계승했다가 1481년 사망했다. 헨리 왕자는 1460-63년에 사망했다. 헨리가 사망하자 영토 발견의 열기가 쇠퇴했지만 알폰수스의 아들 요한 2세가 즉위함과 함께 그 정신이 다시 살아났다.


헨리 2세는 즉위 다음 해(1482년) 영국의 에드워드 4세에게 대사를 파견하여 기니아 정복에 대해 교황의 교서에서 얻은 자격이 있음을 알리면서 당시 일부 영국 상인들이 기니아 무역(노예 무역)용으로 준비하고 있던 함대를 해체해 달라고 요구했다. 영국 국왕은 대사에게 존경을 표하면서 요청한 내용을 모두 받아들였다. 포르투갈 국왕과 영국 국왕은 아프리카 최대 해역 내의 포르투갈 지위(Portugalie et Algarbiorum citra at ultra mare in Africa)에 대해 인정했다. 교황 식스투스(Sixtus) 4세는 사망하기 얼마 전(1484년 8월 12일) 포르투갈 국왕과 그 계승 국왕들에 대해 전임 교황들이 인정한 내용을 모두 받아들였다.

1481년 요한 2세는 기술공 100명과 병사 500명을 기니아에 파견하고 필요한 물자를 모두 지원해 요새를 축조했다. 거대한 베닌(Benin) 및 콩고(Congo) 왕국은 1484-1485년에 발견되었고 희망봉은 1486년 발견되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 요새를 축조하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또한 유력한 왕국들과 통상을 시작했으며 어린 왕자들을 무력으로 강압하여 자신들이 속국에 처해 있음을 인정하도록 했다.

아프리카 내 포르투갈의 권력과 통상권은 모두 이 시기에 확립된 것이다. 이 시기 5대에 걸친 로마 교황들의 칙령에서는 언제나 그 신앙이 가장 두터운 국왕에게 어느 곳에서라도 이교도(참된 그리스도인들)가 발견되면 그 왕국과 재산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으며 '그 백성들을 영원한 노예 상태에 두거나 지상에서 추방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주님의 어린 양들을 보편적 성직자(교황권) 한 명이 다스리는 주님(교황)의 요새에 두기 위함이었다. 그 이후의 포르투갈 국왕들은 주님께 불경스러운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크나큰 은전을 몰수당하는 일이 없었다. 따라서 포르투갈은 유럽 열강들이 간섭하지 않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아프리카 및 동인도 제국과 통상을 계속할 수 있었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수출하지 전에도 50년 이상 동안 본국에 노예들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1508년 처음으로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으로 노예를 수입했으며, 1517년에는 브라질 식민지로 수입했다. 1580년에는 처음으로 설탕 재배를 시작했다. 그 당시 스페인과 연합해야 했던 일은 가장 불행했다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가 적국이 되어 동인도 및 브라질 식민지와 아프리카 식민지 일부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1640년에는 브라질 및 아프리가 영토를 되찾았지만, 동인도 제국의 식민지는 되찾지 못했다.

네덜란드가 브라질을 포기하고 황금 광산이 발견되자 포르투갈은 무역이 성행했으며, 노예의 대량 수입이 이루어져 해마다 2만 5천명씩 로안그로(Loangro)에서 브라질로 노예를 수입했으며 고앙고(Goango)와 케이프 로포스(Cape Lopos)에서 수천명씩 수입하기도 했다. 포르투갈 당국의 기록에 따르면 해마다 5만명 이상씩 모잠비크 연안의 멜린다(Melinda)에서 브라질로 수입했다고 한다. 브라질과 아프리카 식민지는 1세기 동안 이처럼 확장되었으므로 1700년 이전에는 해마다 영국과 교역함으로써 얻은 재화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재화를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

스페인령 아메리카는 제노바,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에서 노예를 수입했다. 스페인이 구입한 영토는 처음으로 연방에서 탈퇴하게 되었다(1861년). 아프리카 노예 무역이 종료되기 전후에 걸쳐 스페인 및 포르투갈 주의 수장에 대해 다른 주의 수장들은 공식적으로 '카톨릭 폐하(His/Her Catholic Majesty)'란 칭호를 사용했다(미국 국무성 기록). 그 수장들만이 교황의 사자임을 인정한 것이다.


카톨릭 사제가 아프리카 노예 무역에 개입한 사실은 19세기의 유명한 시인 J. G. Whittier의 다음 시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뉴올리언스(New Orleans)의 흑인 거주지에 관한 시

크리스천 노예(The Christian Slave)

J. G. Whittier 지음

크리스천 한 명이 가고 있다. 가버렸다!

누가 하나님의 이미지를 갈구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이 시장 바닥의 불쌍한 희생자여

고통 속에서 참고 있는가?

아! 그런 일이?

그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았다

그대와 같이 가장 약하고 천한 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불쌍한 희생자 속에

그대가 동정하는 사랑의 아기가 있음이 서 있는 그대에게서 보이네

또 다시 조롱하는 무리의 희롱 소리

묶여서 팔리고 다시 학대당하네!

팔릴 운명의 크리스천!

채찍에는 혹사당한 노예의 피가 묻어 있고

그대의 잘못과 체면 때문에 노예의 일생은 지겹게 되네

그러나 인내심은 그치지 않으리!

악덕한 튀니스의

두건을 두른 고관에게 갈채를!

어두운 노예 감방이 열리고

수감자들이 밖으로 나오네

그러나 이 불쌍한 노예는 부질없이

날카로운 눈빛을 크리스천 성당으로 돌리네

예배를 드릴수록 몸값은 높아지고

사슬에 박힌 못도 커져가네

오호라!

사제를 닮은 강도들은 타인 제단에 얼마나 서 있을까

기도를 하며 그대에게 피묻은 손을 올리고

거만하게 사악한 눈살을 찌푸린다!

오! 사탕수수 밭에서

아래쪽 논에서, 거래상들의 방에서

불결하고 역겨운 검은 노예선의 감방에서

거칠고 끔찍하며 튼튼한

노예들의 지쳐 있는 쇠사슬에서

하늘에 오르려고 절규하는 외침이

빈 하늘의 공간을 채운다

얼마 동안이나, 오 주여! 얼마 동안이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흑인에 대한 바티칸의 입장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미국 역사상 최대의 인종 폭동(1864년, 뉴욕시 부룩클린)은 휴게스

(Hughes) 카톨릭 대주교가 선동했으며(북부군을 더 징집하려는 링컨 대통령에 대항해서) 방화뿐만 아니라 거주자 및 흑인 고아에 대한 유린 살해가 자행되었다.

(2)제이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이 로마를 점령하자 히틀러의 교황 피우스(Pius) 12세는 로마에 수감된 흑인 병사는 없게 될 것이라고 미군 사령관에게 분명히 약속했다.

(3)세인트루이스, 뉴욕시, 시카고 등의 경찰 가운데 95% 이상이 미국 카톨릭 비밀결사 컬러버스 기사단(the Knights of Columbus) 신도이다. 따라서 시카고 경찰이 저지른 맬콤 X 살인 사건을 검토할 때에는 이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아파트에서 발사된 총기는 경찰의 완전 자동 소총이었다. 총탄 41발이 발사되어 17발이 아마도우 디알로(Amadou Diallo)의 몸에 맞았다. 당시 디알로는 총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경찰은 사복 차림이었고 차량에는 경찰 마크가 없었으며 신원도 밝히지 않았다. 재판 뒤 경찰, 변호사, 배심원들은 파티를 열었다. 뉴욕 시에서 총기를 지니지 않은 채 살해되는(경찰에게) 흑인은 모두 이민 노동자이다. 특별 무장 그룹(저격수)은 흑인 지도자들에 관해 정보를 제공해 주는 대가로 앨라배마의 카톨릭 조직 KKK에게 무장 훈련을 시켰다(또한 불법으로 무기도 판매). 그 결과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살해당했다. 그 조직은 또한 뉴올리언스 대부 Carlos Marcello(J. Edgar Hoover의 동료)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포르투갈 인 라울 마오리(Raul Maori-마르틴 루터 킹의 실제 살해자)가 바로 마약과 무기를 밀수해 카를로스 마르셀로(Carlos Marcello)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흑인들은 점차 복지 혜택에서 제외되는 반면에 카톨릭 이민자(적법 및 불법 모두 포함)는 끊임없이 복지 혜택을 받고 있다. 흑인들은 거리의 갱들보다 카톨릭 경찰을 더 무서워하고 있다. 어느 미국 도시든지 카톨릭의 영향력이 단연 우세하며, 마피아/카톨릭의 권력과 영향력의 비율 및 범죄율은 어느 도시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카톨릭 컬럼버스 학살

 

미국 서부의 인디언 부족은 갈색 옷을 입은 백정, 곧 1519-1540년대 스페인의 탐험가 코로나도(Coronado)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전멸당했다. 멕시코의 아즈텍 및 잉카 제국, 중앙 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 쿠바, 하이티, 그레나다, 괌, 필리핀 등도 마찬가지이다. 알마그로(Almagro), 코르테스(Cortez), 피자로(Pizarro), 발베르데(Valverde), 드 메자(de Meza), 그레고리(Gregory), 세풀베다(Sepulveda), 발레가(Valega)와 같은 사람들, 특히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그레나다 원주민에 대해 잔학 행위를 저지른 죄로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투옥당함)는 원주민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다(이 내용은 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찾아볼 수 있다).

중세 말기의 지리상의 발견에서 바티칸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모두 '타고난 토착 노예'로 보았다. 1960년까지만 해도 어느 공공 도서관에서든지 바티칸의 폭군 제수이트가 유럽 중세 암흑기 내내 종교재판을 통해 잔학행위를 저질렀다는 기록을 읽어볼 수 있었다. 1960년 이후에는 그런 출판물이 모두 제거되었다(이와 같은 웹페이지가 알려지자 국회도서관의 도서 수백 권이 갑자기 사라졌다. 예를 들면 「음모자들의 고백(링컨 암살에 대해)」과 같은 책). 이는 조직적으로 교육 자료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1933년 베를린의 '분서' 사건을 기억해 보라).

이는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마츄 피츄(Machu Picchu, 페루 중앙부 안덱스 산맥 해발 2,100m에 있는 고대 잉카의 성곽 도시 유적)에서도 증명된다. 모두 '성모', 로마 카톨릭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독립전쟁을 영적 자유의 전쟁이라고 한다. 영국 군인은 어느 도시에서나 개신교회 건물 등이 계획적으로 파괴된 것을 보고 난 뒤에 행진해 나아갔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성당건물들만은 예외였다. 곧 '빛과 영광(Peter Marshall과 David Manuel 씀)'이란 기록이 이를 말해 준다. 이 글을 쓴 사람들은 카톨릭 제수이트 조직이 이 잔학 행위의 자행자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 밖의 기록을 보면 이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북아메리카 사령관이었던 영국계 캐나다인 헨리 클린턴(Henry Clinton) 경의 군대는 올리버 델라니(Oliver Delaney) 및 코트랜드 스키너(Cortlandt Skinner)의 여단, 뉴욕시의 자원자, 여왕 근위대(Queens Rangers), 오렌지 근위대(Orange Rangers), 로얄 아메리칸(Loyal Americans), 펜실베니아 충성자들(Pennsylvania Loyalists), 메리랜드 충성자들(Maryland Loyalists), 로마카톨릭 자원자, 서부 저지단(West Jersey)의 자원자, 추격병들(Chasseurs), 충성스런 미국 개혁자들(Royal Americans Reformees), 아일랜드(카톨릭)의 자원자, 영국 군단, 안내자 및 선구자들(Guides and Pioneers)로 구성되었다"(칼 반 도렌(Carl Van Doren)의 「미국 혁명의 비밀 역사」).

사실 그 글쓴이들은 로마 카톨릭 제수이트 조직을 면책시켜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미국 표준판' 성경 번역팀의 일원이었던 사람의 정보를 수용하게 되었다. 그 팀 가운데 33%는 공산주의 전선 성원이었는데, 어떻게 그 팀의 성원과 교제를 하게 되었는지 필자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1964년, 존 스토머(John H. Stormer)의 「아무도 그것을 배신이라 할 수 없다」). 바티칸이 주도한 잔학 행위에 대해서는 「폭스(Foxe)의 순교자의 책」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또한 사제들이나 교황의 통달 회칙에 따라 종교재판 희생자들에게 강요된 복종 요구가 1995년 5월 25일 공표된 제2차 바티칸 회의(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그리스도의 화신)로 인정)와 직접 관련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 회의에서는 변화되지 않는 성찬용 빵을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육신과 피로 간주하는 미사예식에 참가함으로써 그리스도 육신의 중요한 부분이 되는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것이 로마카톨릭 도그마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로마카톨릭이 하나님의 권위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지닌 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어느 종파의 어느 사람에게나 그것을 적용하려 하고 바티칸과 세계 교회주의 운동(W.C.C)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만 목적을 두고 있다면 바티칸이 종교재판 시작 이후로 그 도그마, 입장, 목적, 수단 등을 변경시키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속임수의 연합

 

"우리는 이제 완전한 신앙 통일이 달성된 그 축복 받은 날까지 얼마나 더 여행해야 할지 물어보아야 하며, 우리 모두 평화롭게 거룩한 주님의 미사성체식을 축복할 수 있다. 상호 이해가 깊어지고 이미 우리 사이에 교리상의 통일점이 마련되어 성체식이 영향력 있게 효율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교회라면 단연 신성한 카톨릭뿐이라고 기독교인들이 양심적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될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다. 세계교회주의 운동(W.C.C)의 최종 목적은 세례받은 사람들을 가시적으로 모두 완전히 통일하는 일이다"(앞의 글 35쪽).

"이제 진정한 신앙 합의를 이루기 앞서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는 영역을 다음과 같이 확인해 볼 수 있다.

1)신앙 문제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신성한 전통(Sacred Tradition 카톨릭 전통) 사이의 관계

2)성체식(하나님 아버지께 찬사를 드리는 그리스도의 육신과 피의 성례), 성례 기념물과 그리스도의 실존, 성경에서 흘러나오는 거룩하게 하는 말씀

3)전교구, 장로, 부제라는 3중 성직에 대한 성례 의식인 서품식

4)신앙을 가르치고 수호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권위이자 책임으로 인식되는 교황과 주교의 교회 관리

5)그리스도의 사제와 온 인류를 위해 중재 역할을 하고 있는 영적 성모, 곧 교회의 우상인 동정녀 마리아"(앞의 글 36쪽).

"따라서 대화의 결과를 도출하려면 결과를 분석함과 동시에 그 결과가 사도들에게서 물려받고 주교, 곧 자신들의 '합법적' 목회자 주변에 있는 신도 공동체보다 오래된 신앙 전통과 일관성이 있는지 엄밀하게 검증할 수 있는 정밀한 비평 과정이 필요하다"(앞의 글 37쪽).


이 칙령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너무 커서 이처럼 미국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범위의 광범위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의도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간주된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에 대해 의문점이 있으면 '그 사람들은(They) 하나일지어다'란 칙령을 읽어보면 된다. 교황이 '우리(we)' 대신에 '그 사람들은(they)'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명백히 자신을 배제한 것이다. 교황은 결국 그리스도의 대리자(화신)이므로 자신을 단순한 인간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권력이란 마취 작용이 있어서 논리를 완전히 왜곡시키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 칙령은 스컬 본(Skull &Bones), 700 클럽의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의 전폭적인 승인을 받았다. 또한 '예수회 창시자 이그나티우스 로올라의 영적 권능 발휘' 둘째 주에서 첫 번째 및 두 번째 점을 읽어보라. 이그나티우스 로올라(실제 이름은 이니고 로페즈 드 레칼데- Inigio Lopez De Recalde)는 1534년 스페인에 교황군대 제수이트 조직을 설립했으며, 일루미나이티(Illuminati -빛을 쥐고 있는 자란 뜻)도 설립했다.

 

일루미나이티와 카톨릭

 

일루미나이티(Illuminati)는 훗날 1776년 5월 1일 아담 바이스하우프트

초록색 배경은 하나님 나라의 계절 대표색깔 입니다

Jay Johnston, Christi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