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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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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기원-4
Jul 19, 2008 08:07 PM 기타 에서

(김성일 장로의 창조사학 특강) 

(1)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우리 것’이란 무엇인가

(2)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누가 ‘우리 것’을 말살했는가

(3)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4)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우리는 단일민족인가

(5) 우리에게 공자는 누구인가

(6) 동방의 로마 한(漢) 제국

(7) 해상 왕국 가야의 비밀

(8) 우리는 왜 불교를 들여왔는가

(9) 김유신의 꿈과 좌절

(10) 우리에게 그분은 말씀하신다

(11) 우리에게 거는 하나님의 기대

* 고대 동아시아지역의 여러 민족

동이(東夷) : 堯(요)임금 시대로부터 시작된 동방족의 칭호

맥(貊) : 단군조선 일부와 부여에 대한 호칭

읍루 : 漢(BC 200)에서 晋(BC 419)까지 만주 동북방에 살았던 어렵, 혈거족

동호 : 한나라 초(BC 209)에 조양 지방의 조선인들을 사마천이 지칭

선비, 오한 : 부여계 번조선(동호)의 후예이며, 前漢 중엽(BC 100)부터 시작된 지칭

몽고 : 부여계 번조선(동호)의 후예인 선비족으로, 4세기 중엽부터 형성된 종족을 지칭

거란 : 열하성 漢水 남쪽에서 화룡의 북쪽까지에 사는 부여계 선비족의 후손.

돌궐 : 선비족의 후예로 후위의 테무제(AD 423) 이후 알타이산(金山) 지방에서 일어났음.

흉노 : 先秦(BC 249)에서 漢代(AD 220)까지의 북방민족 일반을 史記와 漢書가 기록한 호칭

물길 : 남북조 시대(420-580)의 읍루인을 지칭

말갈 : 隨나라(618)와 唐나라 初期(670)까지의 원형의 퉁구스 만주족

여진 : 10세기 말엽 遼帝가 남북만주에 거주하는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지칭

퉁구스 : 18세기 이래 서양인들이 사용하는 만주족의 칭호

先 퉁구스 : 18세기 이래 서구인들이 지칭한 중국본토 내의 조선족

 * 고대 중국의 삼황오제 비교표

(1)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우리 것’이란 무엇인가

요즘 각 방송에서 개량 한복을 입은 사람들의 특강이 대유행이다. EBS에서 김용옥씨의 노자 특강이 크게 히트하자 다시 KBS에서 그를 데려다가 공자 강의를 시켰고 그 물결을 타고 국악 강의에 한방 의학 특강까지 기세를 올리고 있다. 왜 갑자기 이런 현상들이 붐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사실은 당연히 있어야 할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 민족은 4천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다고 자랑하지만 가난 속에서 그런 자존심을 다 잊고 살아왔다. 게다가 한일합방으로 오욕의 세월을 보냈고 해방 후에는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더 큰 수치와 모멸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는 당장 하루를 사는 생계가 더 급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경제 개발이 시작되었다. 정부의 예측을 앞질러가며 성장곡선이 급상승을 계속하자 우리의 생활도 몰라보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굶기를 밥먹듯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주차 문제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전쟁통에 족보를 잃은 집들은 그것을 찾아 복원하기 시작했다. 집안의 자존심을 되찾으려는 생각은 다시 사회적인 유행으로 발전했다.

재야에서도 이미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의 맥을 이어 문정창, 천관우 등의 ‘잃어버린 역사 찾기’를 위한 연구가 시작됐다. 또 대학에서도 신진 사학자들이 일제시대에 형성된 고대사를 재검토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와 함께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등 민간사서들도 출판되어 넓게 읽혀졌던 것이다.

이런 경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이 80년대에 시도됐던 ‘국풍’운동이었다. 반독재 투쟁을 벌이고 있던 재야 세력이 호응해주지 않아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정부는 새로 설립한 정신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민족사관 연구에 힘썼다. 문민정부 이후에는 다시 방송권이 ‘우리 것 찾기’를 주도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외래문화로 분류된 기독교는 방송가에서 소외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리 것 찾기’는 시청률 제고를 위해 동원된 폭력, 불륜, 섹스 등 상업주의 문화때문에 일시 주춤하는 듯 했으나 소위 IMF 사태로 상처입은 민족적 자존심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각급 학교에 단군상을 세우는 일에서 동양철학 특강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현상들이 나타난 것이다.

또 서양을 휩쓴 포스트 모더니즘과 다원주의의 물결을 타고 소위 ‘퓨전 문화’라는 것도 등장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섞어 놓은 ‘열린 음악회’가 생기고 교향악단이 국악인들과 협연을 하는가 하면 각국의 음식을 뒤섞어 놓은 퓨전 요리에 이르기까지 여러 양상의 혼합주의 문화가 나타났다. 돈과 무력으로 동양을 지배해온 서양 문화를 우리 것의 바탕에서 다시 이해해 보자는 고민에서 나온 시도들이었다.

‘우리 것 찾기’의 물결은 이렇게 오랜 배경이 있었는데도 그동안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한국 교회는 당황하고 있다.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는 현상에 놀라서 단편적인 대응에만 급급하다 보면 교회는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문화적 천덕꾸러기로 따돌림 당할 위험성도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이며 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신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이후로 전세계에 흩어진 모든 민족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 여러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이 그들 모두가 다양하게 살기를 바라듯이 하나님께서도 모든 민족의 다양성을 바라실 것이다. 하나님은 히틀러나 스탈린같은 독재자처럼 획일주의를 바라는 분이 아니시다. 모든 민족에게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준비해주신 특별하고 다양한 문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 것 찾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사대주의나 국수주의가 아니라 균형잡힌 기독사관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인식하여 우리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예수전을 판소리로 부른 박동진 선생이나 예배 음악에 국악을 도입한 선구적인 분들의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또 ‘우리 것 찾기’가 잘못 전개되지 않도록 바로 잡아줄 책임도 있다.

단군이란 본래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제사장이라는 직책 명인데도 그 상을 만들어 세우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또 유대인들은 2000년전의 땅을 찾아 들어가서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고조선 때부터 섬겨온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를 외래 종교로 단정하고 들어온지 1700년도 안되는 불교는 전통 종교라고 내세우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진시황제가 BC 212년에 공자의 책을 다 불태웠고 그 제자 460명을 모두 땅에 묻어서 죽였는데 김용옥씨는 지금 ‘없는 공자’를 강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그렇게도 찾기 원하는 역사가 없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기록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삼국이전의 역사는 아예 빠져 있거나 그 부스러기 몇 줄만 남아 있다. 우리는 역사를 상실했고 언어마저 상실했다. 방금 필자가 쓴 ‘역사’와 ‘상실’과 ‘언어’라는 단어도 우리 말이 아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 중에서 순수한 우리 말은 거의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지금 ‘우리 것 찾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것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러나 기대를 가지고 한번 나서보자. 하나님께서 우리가 잊었던 기억을 되살려 주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그 행사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시 111:2-4) 

 (2)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누가 ‘우리 것’을 말살했는가

‘우리 것’을 찾는 일에 나서기 전에 우선 짚어 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어떻게 해서 없어졌으며 누가 그것을 없앴느냐 하는 것을 따져 두는 일이다. 필자는 학생 시절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나라들이 그 나라의 자랑스러운 고대사를 가지고 있는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송두리째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면 우리 조상들은 그 이전에도 역사를 기록하여 남겨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는 고조선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고기’(古記)를 인용하였는데 이는 민간 사서들이 말하는 신지유기 또는 배달유기 같은 고조선의 역사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 유기(留記)가 있고 백제에도 서기(書記)라는 사서가 있었다고 되어 있으며 신라의 진흥왕은 대아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이들 사서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 방대한 사서들을 다 없애 버렸을까, 필자도 처음에는 다른 학자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대사를 없애버린 것은 중국이나 일본의 소행으로 추측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러워하고 못마땅하게 여겼던 그들이 공격해 왔을 때 역사서를 가져갔거나 다 태워서 없애버린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아마 고대의 사관들도 그것이 유실될 것을 염려하여 여러 사본을 만들어 분산 보관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대사를 없앤 자들은 그것을 철저하게도 다 뒤져내어 깡그리 말살해 버렸다.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의 서고에도 남겨진 사본은 하나도 없다. 만일 우리 고대사를 없앤 자들이 외국인들이었다면 그들이 우리 국내에 분산 보관되어 있는 사서들을 그토록 철저하게 찾아낼 수 있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누가 그들에게 모든 사본이 숨겨져 있는 곳을 다 가르쳐 주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필자는 삼국사기에서 이상한 부분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세히 읽어 보았다.

“진흥왕 6년(BC 545) 7월에 이찬 이사부는 왕에게 아뢰기를 국사라는 것은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잘하고 못한 일을 만대에 보이는 것이온데 사기를 수찬해 놓지 아니하오면 후대에 무엇으로서 사실을 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은 그렇다 하고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널리 문사들을 모아 국사를 수찬하였다”

여기서 이찬 이사부라는 사람은 당시에 병부령 즉 군부의 수장이었다. 그리고 왕이 국사 수찬의 책임을 맡긴 거칠부 역시 이사부 수하의 무장이었던 것이다. 왜 국사 편찬의 일을 군부의 수장이 건의했으며 또 무장인 거칠부가 그것을 주관하게 되었던 것일까.선대의 법흥왕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그가 죽은 후 조카인 진흥왕이 7세에 즉위했는데 진흥왕 6년이라면 그가 13세 되던 해였다. 당시 왕의 나이가 적어 모후 즉 법흥왕의 딸인 식도부인이 섭정을 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에 뭔가 수상한 기미가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즉 신라 군부세력의 수장인 병부령 이사부는 13세의 진흥왕을 대신하여 섭정하고 있던 왕태후에게 압력을 가해 국사를 고쳐 쓰게 하고 그 일을 자기 부하인 거칠부에게 수행하게 했다는 혐의가 보이는 것이다.

그들 군부세력은 왜 사관들이 담당하는 국사에 손을 대려고 했을까.BC 545년이면 신라가 금관 가야를 쳐서 멸망시킨지 13년째 되는 해이다. 신라의 제5대 파사왕 때 기록에 의하면 신라는 가야의 수로왕을 매우 존경하여 그를 모셔다가 국정의 자문을 받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가 그 가야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이유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이 있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는 당시 신라를 괴롭히던 고구려에 대한 비난보다도 가야에 대한 적대적인 표현이 자주 나온다. 신라의 군부는 가야에 대한 배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사에 손질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신라의 체제와 문화를 그대로 물려받았던 고려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에는 신라의 ‘국사’를 근간으로 해서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기록을 잘 읽어보면 신라와 가야에 관계된 부분에 대한 가필과 조작은 누구라도 무장들의 거친 솜씨를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치졸하다. 필자는 본고에서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상세히 거론할 계획이다. 필자는 신라의 군부가 가야 문제 외에도 고구려나 백제와 왜국 등 다른 인접국과의 관계도 그들이 계획하는 일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미리 여러 군데를 날조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신라 조정은 삼국을 통일한 후에 자기네 ‘국사’와 다른 ‘고구려유기’와 ‘백제서기’의 상당 부분을 삭제하거나 없애버렸을 것이다.

고려 시대에 삼국사기를 기록한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한 평장사(平章事) 즉 토벌사령관이었다. 당시 묘청은 고조선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칭제건원’을 하자고 주장했던 민족주의자였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은 묘청의 난을 평정한지 10년 후였으니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김부식은 아예 그 이념적 화근을 뽑아버리려고 삼국사기에서 고대사를 없애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의 침략을 받아 50년 이상 지배를 당하고 있던 시대에 삼국유사를 집필한 김견명은 피폐해가는 민족 정신을 아쉬워하며 그 앞 부분에 고대사의 일부를 언급해 놓았다. 어쨌든 필자가 추리해본 결과로는 우리의 고대사를 없애버린 장본인은 바로 우리 조상들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들 자신이 했기 때문에 그토록 철저하게 모든 사본을 찾아내어 모조리 없애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초개같이 흩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네 응득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연고라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서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렘 13:24-26)

 

 

(3)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인본주의적인 사학자들은 민족이동설을 부인하고 병행발생설을 주장한다. 영장류의 고릴라, 침판지, 오랑우탄 등이 모두 다른 지역에 분포되어 있듯이 인류도 처음부터 여러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사실로 믿고 있는 기독교인은 인류의 조상이 아담과 하와이며 대홍수 이후에 살아남은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모든 민족이 태어났다고 믿는다. 홍수가 끝난 후에 그 셈과 함과 야벳 자손들은 바벨탑 건축의 실패와 함께 전세계로 흩어졌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사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9)

필자는 우리 한민족도 인류가 바벨탑을 쌓았던 장소로부터 아라랏 산을 지나 북상하여 다시 동쪽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현지 지도를 펴놓고 우리 조상들이 어떤 경로를 따라 이동해 왔을까 하는 것을 추리하여 ‘홍수이후’라는 소설을 썼고, 다시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를 썼던 것이다. 그 후 창조사학회를 결성한 기독교인 학자들이 필자의 그 가설을 검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학술조사단과 촬영팀이 국민일보 후원으로 54일간에 걸쳐 그 경로를 모두 답사하고 해당 지역의 대학을 방문하여 학자들과 만나 증거를 수집했으며 고대의 유물들을 찾아 확인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필자의 추리가 대부분 정확했다는 것이다. 조사단은 그 모든 경로에서 민족 이동과 관련된 고리들을 찾아냈다. 그 첫째는 유물의 고리였다. 셈족 토기의 특징인 환저형 토기에서부터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생활용구, 그리고 우리 말과 같은 SOV형 교착어 사용 지역이 그 경로에 모두 분포되어 있었고 놀랍게도 그 모든 지역에 대홍수와 방주, 그리고 홍수 때의 정보 전달자인 까마귀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창세기와 연결되는 설화들이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 조사단의 일원이었던 이벤허 박사(중국명 李賓漢)는 그 결과를 정리, 중국 북경대학에 논문을 제출하여 고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북경대학이 민족이동설을 인정한 것이다.

이 민족이동설을 우리 나라의 일부 국수주의적 재야 학자들이 거꾸로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 민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동방으로 이동해온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가 그 쪽보다 더 오래되었으므로 여기서 그 쪽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답사 결과는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명백하게 증명했다. 그것은 각 지역에서 출토되는 석기에 사용된 돌들의 원산지 추적에서 나왔다. 많은 돌들의 원산지가 출토된 지역과 다르게 나왔는데 그 결과는 석기의 소지자가 성경대로 서에서 동으로 옮겨 온 것을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명백한 증거는 전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분포되어 있고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까지 건너간 흑요석(黑曜石) 공구였다. 그 흑요석이 생산되는 지역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오직 아라랏산 부근밖에 없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3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어 삼칠일을 먹고 견디면 사람이 되게 해 주겠다고 했는데 곰이 끝까지 견디어 여자가 되었고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 왕검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중국 산동성 가상현의 무씨묘에 있는 화상석을 학자들은 환웅천강도라고 하는데 그 세 번째 단에 보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있고 곰과 호랑이의 얼굴을 한 두 사람이 싸워서 호랑이 쪽이 지는 그림이 들어 있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곰 토템 족이 호랑이 토템 족과의 경쟁에서 이긴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BC 4천년 경 메소포타미아에는 이미 3,600명의 신들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에는 불교가 들어올 때까지 오직 하나님만 있었고 다른 신은 없었다. 수많은 신들을 섬기는 서쪽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서 옮겨온 그들이 곰이나 호랑이를 숭배했을 까닭이 없다. 곰과 호랑이는 오늘날 프로 야구팀의 심볼처럼 부족을 상징하는 로고였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 단군이 처음 등장하는 자료는 삼국유사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의 단은 박달나무 단(檀)이 아니라 제터 단(壇)이다. 즉 단군(壇君)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제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책임자인 제사장이라는 직책명이다. 그 첫번째 단군의 이름이 바로 왕검이었다. 그러므로 혹시 왕검상을 만든다면 또 몰라도 단군 즉 제사장의 상을 만든다면 이는 어이 없는 일이 된다. 후일에 이승휴라는 사람이 제왕운기를 쓰면서 그 단군을 신비화하여 민족 정신의 구심점으로 삼기 위해 박달나무 단자를 썼는데 그 뒤로 단군이 박달나무에서 내린 신으로 바뀐 것이다.

고조선의 시작을 우리 학계는 BC 2333년으로 계산한다. 성경에 기록된 연대를 계산하면 아담의 탄생은 BC 4114년이고 대홍수가 있었던 것은 BC 2458년이며 민족들이 흩어진 것은 벨렉이 태어난 해(창 10:25)로 계산하면 BC 2357년이다. 즉 우리 민족이 바벨탑에서 동방으로 오기까지 24년이 걸렸다는 뜻이다. 당시의 형편으로 미루어보아 꽤 빠른 속도이지만 우리 조사단은 볼가강 하류에 있는 아조프 박물관에서 바퀴가 달린 집의 모형을 발견하고 그 속도가 빨랐던 이유를 수긍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환단고기’가 말하는 단군 이전의 신시 환국(桓國)의 가설이나 단군상을 만든 사람들이 말하는 BC 7197년은 또 무엇인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도 연대를 황당하게 부풀려 놓은 초기 왕조의 역사라는 것이 있었다. 필자는 그것이 홍수 이전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상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우리 조상들이 동방으로 오기 전 즉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써 놓은 것일 수도 있다. 필자는 소설 ‘홍수이후’에서 그것을 니므롯과 아카드의 싸움으로 추리해서 쓴 적이 있다. 우리가 서쪽에서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면 강화도 마니산에 가볼 것을 권하고 싶다. 마니산은 본래 ‘마리산’ 즉 ‘머리산’이었는데 첫번째 단군인 왕검이 그 정상에 쌓은 천제단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서쪽에서 섬겼던 그 하나님을 향해서 제사드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4)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우리는 단일민족인가? 

우리 민족이 고려시대에 137년간이나 몽골의 지배를 받고 다시 조선 말기에 한일합방으로 36년간 수모를 당하면서 민족 정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내세웠던 것은 소위 단일민족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성은 매우 복합적이다. 어떤 때에는 셈족의 특징대로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것 같은데 뜻밖에도 한국 사람들은 매우 진취적이기도 하다. 실제로 강인한 여성들의 힘으로 한민족은 버티어 왔고 지금도 인터넷 인구나 휴대전화 소지율은 세계의 선두에 서 있다.

우리 민족은 정말 단일 민족일까? 물론 도중에 더러 타국에서 들어와 귀화한 인물들도 있기는 하나 우리가 대체로 단일 민족이라는 것은 맞는 말일까? 그러나 우리 고대 국가의 언어를 비교 연구한 강길운 박사의 대답은 다르다. 그는 우리 민족 중에 길약어와 같은 계통의 언어를 쓴 북방계 고(古)아시아족과 알타이어 계통의 언어를 썼던 고구려계의 지배층이 있었고 또 가야어에는 인도의 드라비다어가 혼재되어 있다고 했다. 같은 SOV형의 교착어를 썼어도 그 계통이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설화는 그 계통이 고조선에서 부여로 내려오는 재래 질서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주몽은 하백의 딸이라고 자처하는 여인 유화(柳花)가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로 말을 잘 다루고 활을 잘 쏘아서 부여왕 금와의 아들들이 그를 시기했다. 
그래서 주몽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함께 부여를 떠나 졸본에 이르러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이 주몽의 설화는 말과 활에 능하고 진취적인 여성이 국면을 이끄는 고구려적 성품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고구려에서 백제가 나왔고 훗날 중국 대륙을 뒤흔든 선비도 같은 계통이며 발해와 몽골도 모두 고구려에서 나온 알타이계의 기마 민족이었던 것이다. 

창조사학회의 학술 조사단은 알타이 지역과 몽골 지역을 모두 답사했다. 거기서는 여자가 대외적으로 집안을 대표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즉 손님을 맞고 대접하는 사람은 여주인이고 남자들은 나서지를 않는다. 또 그들에게는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같은 설화가 있었다. 이것은 고아시아족에서 보이는 곰의 설화와 대조적이다. 곰의 설화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오는데 알타이와 몽골의 설화에서는 하나님의 딸이 목욕하러 내려오는 것이다. 언어 계통이 같은 이 두 갈래의 셈족은 약 3백년의 간격을 두고 먼저 온 자와 나중 온 자가 되어 동방에 도착한 셈이다. 그렇다면 혹시 성경에도 셈의 자손들이 동방으로 갔다는 사례가 있었을까. 그런데 성경에 그 두 번의 사례가 있었다. 그 하나는 바벨탑 공사가 중단되었던 해로 추정되는 BC 2357년이었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웹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창 10:25-32) 

그런데 이보다 약 3백년이 지난 후에 또 한번 동쪽으로 간 셈족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고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후처와 관계가 있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창 25:1-2)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이 후처의 아들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후처 그두라의 아들들을 동쪽 나라로 보냈다고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東國)으로 가게 하였더라”(창 25:5-6)

그의 서자 즉 그두라 소생의 여섯 아들 중에서 욕산과 미디안과 수아는 그 후에도 성경에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므란과 므단과 이스박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만일 그두라가 그 세 아들을 데리고 동방으로 옮겨갔다면 그녀는 아들들을 지휘할 정도로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한 활동적인 여성이었을 것이다. 또 하백의 딸 즉 다른 신을 섬기던 지역 출신의 여성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던 천손족 해모수와 사통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유화부인처럼 매우 진취적인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두라의 아들들이 동방으로 오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또 하나 있다. 이 알타이계 숙신에 속하는 선비족이나 몽골족 등이 대륙의 중원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힘은 그들이 말과 활에 능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특수한 군대 조직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천부장, 백부장, 십부장 등의 제도였다. 이 제도는 대규모의 병력을 신속하게 움직이도록 할 수 있는 강력한 전투 체제였다. 그런데 성경에는 광야에서 2백만명 가까운 히브리 백성들을 지휘하느라고 애쓰는 모세에게 그의 장인 즉 미디안 족장인 이드로가 그에게 이 조직을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출 18:21-22) 

이것이 과연 인본주의적 사학자들이 말하는 병행발생설적 우연일까? 우리는 이제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좁은 견해를 깨야 한다. 필자는 중국 섬서성 박물관의 입구에서 중국 동부에 동이족이 살았다고 표시된 ‘고대 중국의 인종분포도’를 보았다. 동이에 속하는 소호족이 난하를 건너 대륙의 동쪽에 들어가 살았고, 야벳계로 보이는 하화족은 황하의 상류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동이족이 흩어져 살았던 중국 동부와 만주 지역 그리고 한반도와 일본까지를 모두 포함한 '동방’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강화도 마리산은 바로 그 모든 지역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5) 우리에게 공자는 누구인가 

필자가 중국의 유적과 유물들을 돌아보고 고고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들과 만나 대담하면서 놀란 것은 중국 대륙의 역사가 동이족과 하화족의 경쟁과 협력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었다. 현재 중화 사상을 이끌고 있는 하화족을 중국인들은 화하(
초록색 배경은 하나님 나라의 계절 대표색깔 입니다

Jay Johnston, Christi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