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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기원 -1 (일본 역사)
Jul 19, 2008 08:07 PM 기타 에서

일본은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정서적으로는 먼 나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일본인은 윤리의식과 예의범절은 강하지만 양심적 도덕의식은 약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인은 개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집단주의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변태나 도피, 광적인 취미생활 
등으로 해소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본인은 종교성은 강하지만 미신종교나 천황숭배, 관습 등을 버리지 못하고 기독교 같은 정통 종교를 
배격하고 있습니다.
일본사람은 그러면서도 모방을 좋아해 신토 참배를 하면서도,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받으며, 불교식으로 장례를 합니다.

어쨋튼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셈족의 후예로 하나님을 믿던 민족입니다.
두 민족 모두 유대인 못지 않게 머리가 좋고, 각종 능력이 뛰어나며, 영적입니다.
일본인은 종교적 갈망을 풀지 못하고 오움 진리교 같은 괴기스러운 신비주의 종교에 빠지거나, 우울증이나 편집증
같은 정신병에 걸리거나, 귀신들림 현상으로 고생하거나, 결국 자살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일본 정부가 메이지 유신 이 후 기독교의 전파를 방해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천황 숭배를 조직적으로 퍼뜨린데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기독교인은 1%도 안되는데, 1억 2천만명이나 되는 일본인이 거의 구원을 받지 못하고 심판에 이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 목차

A. 일본 역사

1. 야요이 시대 

2. 야마토 시대 (大和 時代) 

3. 나라 시대 (奈良 時代) 

4. 헤이안 시대 (平安 時代) 

5. 카마쿠라 시대 (謙倉 時代) 

6. 무로마찌 시대 (室町 時代) 

7. 아즈찌 모모야마시대 (安土·桃山時代) 

8. 에도 시대 (江戶 時代) 

9. 메이지시대(明治時代) 

10. 타이쇼오, 쇼오와시대 

 

B. 일본인의 기원

 

C. 일본인의 종교

 

D. 일본 왕실의 기원

 A. 일본 역사

1. 야요이 시대 

기원전 3세기경 벼농사가 시작되고 동이나 철 등의 금속기가 사용되었다. 쌀은 수 천년 전 열대아시아에서 재배화된 것으로, 일본에는 중국남부로 부터 직접, 혹은 한반도 남부를 경유하여 전해졌다고 말해지는데, 벼농사의 전파에 의해 일본은 수렵채집경제에서 농경시대로 본격적으로 이행해 갔다. 당시의 농사짓는 모습은 동탁에 그려진 그림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동탁은 이 시대의 유적에서 수많이 출토되고 있고 제사에 쓰여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사람들은 벼농사 때문에 저지에 살게끔 되고, 거기에 촌락을 형성했다. 이 시대의 모습을 전해주는 시즈오카시에 있는 토로 유적에는 수전이나 주거 유적과 함께 쥐가 들어가지 못하게 바닥을 높게 만든 고상식 창고 유적이랑 목제 농구가 남아있다. 

이 때의 토기는 전시대의 것보다 튼튼하고 모양도 더 세련된 것으로 바뀌었다. 이들 토기는, 토오쿄오 분쿄오구의 야요이쵸오(彌生町)에서 최초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야요이식 토기라고 부른다. 또 기원전 3세기경부터 약 600년간을 야요이시대라고 한다. 

1~3세기경이 되면, 벼농사 기술의 발달에 따라 촌락이 점차 커져 나라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유력한 지도자가 나라의 왕이 되고 강한 왕은 약한 왕을 복속시키고 더욱 큰 나라를 만들었다. 이 때의 일은 거의 알 수 없지만, 중국의 『후한서』속에 1세기경, 왜인의 나라에서 사신이 왔기 때문에 후한의 황제가 금인(金印)을 하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약 200년전 후쿠오까현에서 한 농부가 우연히 땅속에서 그 금인을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漢倭奴國王]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 나라는 후쿠오카시 부근에 있었던 작은 나라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 중국 『위지』의 「왜인전」에 의하면, 왜인의 나라는 30개 정도의 소국들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여왕 히미꼬(卑彌呼)의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이 가장 강력하고, 히미꼬는 3세기초 위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고 한다. 이 야마타이국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는 상태이다. 

2. 야마토 시대 (大和 時代) 

4세기경, 야마토지방(지금의 나라현)의 호족세력이 연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야마토정권을 성립시켰다. 야마토정권은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중앙의 정치조직을 정비하고 야마토라는 국가를 세우고 지배자를 대왕으로 불렀다. 이 때의 유력자들의 고분이 전국에 많이 남아있는데, 사까이시(堺市)에 있는 닌토쿠천황(仁德天皇)의 고분이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당시의 고분은 앞이 4각형이고 뒤가 원형인 전방후원분이 많으며, 고분 주위에 인간, 동물, 집, 배 등의 모양을 한 토기(하니와)를 배치하고 있다. 

5~6세기에는 한반도나 중국대륙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건너와 일본에 살게 되었다. (국제 일본문화센터의 하니하라 카즈오 교수는 야요이-나라시대에 걸친 천년동안에 한반도로부터 백만명에 가까운 이주민이 있었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이 사람들을 일본에서는 통상 도래인(渡來人), 혹은 귀화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토목, 양잠, 직물 등의 전문적인 일에 종사 하거나, 관청에서 한자를 사용하여 기록이나 계산, 외교문서 작성 등을 했기 때문에, 앞선 기술이나 지식을 통하여 일본인의 생활의 진보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보여진다. 유교가 서적과 함께, 불교가 경전이나 불상들과 함께, 중국으로부터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에 전파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이것들이 모두 일본인의 학문, 사상, 종교, 예술등의 초석이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6세기 중엽 가장 유력한 호족 세력이었던 모노베씨(物部氏)와 소가씨(蘇我氏)가 정권쟁탈전을 벌인 결과, 불교의 수용에 적극적인 소가씨가 보수적 세력인 모노베씨를 누르고, 조정의 정치를 거의 독점하게 된다. 또한 이 때 쇼오토쿠태자(聖德太子)가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섭정에 취임(593), 그는 소사씨 등의 호족과 손잡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의 기초를 닦기위해 노력했다. 우선 관위 12계를 만들어서 관리들의 순위를 정하고, 능력있는 자를 관리로 발탁했다. 

또한 불교와 유교 사상을 받아들여 헌법 17조를 제정했다. 그것은 「화합이 중요하다」「부처님을 공경하라」는 따위의, 천황을 모시는 관리들의 마음가짐을 기술한 것으로서, 오늘날의 헌법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그는 또 사신과 유학생등을 중국에 파견 (견수사), 선진문화의 수입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쇼오토쿠태자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기 때문에, 불교를 널리 전하기 위해서 야마토의 이카루(斑鳩)에 호오류우지(法隆寺)를 세웠다. 이 절은 한번 불이 났지만 곧 재건되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호오류우지에는 석가삼존상을 비롯하여 훌륭한 미술·공예품이 보존되어 있으며, 호오류우지 뿐만 아니라 나라에 있는 츄우구우지(中宮寺), 쿄오토에 있는 코오류우지(廣隆寺)에도 예술성이 뛰어난 미륵보살상이 남아 있다. 이 시대의 문화는, 야마토의 아스카(飛鳥)나 이카루를 중심으로 번성했기 때문에 아스카문화라고 부른다. 아스카문화는 대륙의 영향이 강하여, 멀리 그리이스나 서아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도 적지 않다. 

쇼오토쿠태자의 사후, 소가씨들의 세력이 더욱 강화되어, 그들의 전횡이 극에 달하자, 황태자인 나까노 오오에(中大兄)와 호족의 한 사람인 나까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 등은, 645년 소가씨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었다. 이것을 大化의 改新이라고 한다. 大化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제정된 연호이다. 대화개신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를 확립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그 당시까지 호족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인민을 모두 천황이 소유하는 것으로 전환시키고(公地·公民化), 호족은 도읍이나 지방의 관리로 만들어 버렸다. 

중앙정부에는 제사를 관장하는 신기관(新祇官)과 정치를 담당하는 태정관(太政官)의 2관과 8省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중앙정부가 임명한 관리가 국사(國司)라는 이름으로 파견되었다. 모든 인민을 호적에 등록시키고, 그에 따라 일정한 토지(口分田)를 나누어 주었다. 토지에 따라 쌀이나 천으로 세금을 조정에 내게하고, 사람이 죽을면, 토지를 반납하게 했다. 그 밖에도 남자에게는 도읍이나 지방의 토목공사 등에서 일해야 하는 勞役의 의무가 부과되었으며, 도읍지나 큐우슈우의 국경을 경비하는 병역의 의무도 있었다. 


3. 나라 시대 (奈良 時代) 

710년에, 조정은 중국의 당왕조의 수도인 장안(지금의 서안)을 모델로 삼아, 나라에 헤에죠오교오(平城京)라는 도읍을 건설했다. 가로 세로로 넓은 도로를 만들고, 천황의 궁전, 귀족들의 저택, 절 등이 늘어서 있었다. 푸른 기와지붕에 빨간 기둥, 흰 벽의 당나라풍의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는 나라의 도읍지는 마치 아름다운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것 같다고 노래 불려졌다. 

平城京은 약 70년간 수도로서 번창했는데, 이 동안을 나라시대라고한다. 나라시대는 大寶율령에 근거하여 천황에 의한 정치(율령정치)가 행해지고, 도읍지는 번창하고 귀족들은 화려한 생활을 즐겼다. 시장이 생겨나고, 708년에는 화폐도 사용되어졌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노역, 병역때문에 가난에 허덕여야만 했다. 그중에는 토지를 버리고 도망쳐버리는 자도 생겨났다. 그래서 조정은 새로이 초지를 간척하는 자에게는 그 토지를 영원히 소유하게 해 주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자 유력한 귀족이나, 신사나 절, 지방호족 등이 앞을 다투어 대규모적인 간척사업을 하여 자신들의 토지를 확장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생긴 사유지(=장원)는 그 후에도 점점 확장되어가서, 율령정치의 근본인 公地公民제도가 붕괴되어 버린다. 조정의 정치도 부패하여 넓은 토지를 가진 귀족이나 승려들이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됐다. 

나라시대 중반, 흉작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귀족과 승려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불심이 깊었던 쇼오무 천황(聖武天皇)은 부처의 힘으로 사람들의 불안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나라에다 토오다이지(東大寺)를 건립하고, 그 안에 본존으로 높이가 16m나 되는 금동대불을 만들었다. 토오다이지 바로 옆에 쇼오소오잉(正倉院)이 있는데, 이것은 쇼오무 천황이 사용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지금도 수많은 보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 중에는 중국이나 인도, 페르샤등으로 부터 수입된 진귀한 공예품도 섞여 있다. 그 유물들이 1200년 뒤인 오늘날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은, 쇼오소오잉이 통풍이 잘되고, 습기를 막는 일본풍토에 적합한 목조 건축법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천황의 허가 없이는 절대로 열 수가 없는 창고이기 때문이다. 

조정은 7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십수차례나 견당사를 파견, 당왕조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 텐표오 문화(天平文化)라고 불려지는 이 시대의 문화는, 정치가 불교에 의한 진호국가를 이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문화가 고도의 발전을 보이고, 또한 문화전반에 걸쳐 당문화의 영향이 농후하다. 국가에 의한 당문화의 적극적인 섭취를 반영하여, 현란한 문화의 추진자는 귀족계급이었으며, 중앙편중의 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万葉集』와 같이 각계 각층 사람들의 적나라한 생활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도 생겨났으며, 천황 가문의 유서 깊음과 그 권력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사편찬이 국가적 사업으로 거행된 것은 당나라에 대한 일본의 국가 의식의 발전이라고도 생각되어진다. 

平城京 :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한 것이지만, 규모는 그보다 작은 동서 4.2km 남북 4.7km의 크기였다. 북쪽 중앙에 천황의 궁궐이 있고, 주작대로를 경계로 左京, 右京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동서남북으로 뻗어진 도로에 의해 구획되어지고 남북은 條, 동서는 坊으로 위치를 표시했기 때문에 이런 도시형태를 조방제라고 한다. 

견당사 : 630년 제 1회 견당사가 파견된 이래 894년 스가와라노 미찌자네(管原道眞)의 건의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13회 파견되었다. 8세기에는 그 조직도 대규모이었으며, 견당사 이외에도 유학생, 유학승등이 동행하여, 국제적으로도 앞선 당나라의 정치제도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입했다. 일본문화의 발달에 끼친 영향은 실로 다대하다고 할 수 있다. 

 

 

4. 헤이안 시대 (平安 時代) 

칸무(桓武)천황은 혼란한 정계의 기풍을 일신하고 율령정치를 쇄신하기 위해서 794년 헤이안쿄오(平安京=오늘날의 교오토)로 옮겼다. 이후 1192년 카마쿠라 막부가 성립되기까지 약 400년간을 헤이안시대라고 부른다. 

헤이안 초기의 율령정치 쇄신과정에서 후지와라(藤原)씨가 정치적으로 대두되게 된다. 이들은 정부의 중추부를 장악하고 다른 유력씨족들을 제거하는 한편, 천황의 외척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셋쇼오(攝政), 칸빠쿠(閔白)직을 독점했다. 그 결과 천황을 대신하여 후지와라씨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고 소위 셋칸정치(攝閔政治)를 전개했다. 셋쇼오·칸빠쿠 둘 다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집행하는 직무로서, 천황이 어릴 때는 셋쇼오, 천황이 성인이 되고 나면 간빠쿠가 정무를 담당했다. 

후지와라씨들이 이 지위를 독점·세습화했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는 후지와라씨들에 의한 독재정치였다고 할 수 있다. 

후지와라씨들에 의한 셋칸정치(攝閔政治)의 전성기는 10세기말에서부터 11세기 초반에 걸친 후지와라 미찌나가(藤原道長)·요리미찌(賴通)시대였다. 중앙에서 후지와라씨들에 의한 셋칸정치가 확립되어간 반면, 지방에서는 정치나 치안의 기강이 흐려지고, 그러한 와중에 즈료오(受領)로 불리는 지방관리들이 사재를 축적, 경제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정치가 천황중심의 율령정치에서 후지와라씨 중심의 귀족정치로 이행되어감에 따라, 공지공민제가 붕괴되고 토지의 사유화를 의미하는 장원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그런 장원을 가장 많이 소유한 것은 물론 후지와라씨들이었다. 그 장원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입은 셋칸정치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9·10세기에는 고대국가의 전환기에 해당하는 시기인데, 그것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 앞시대와 마찬가지로 귀족문화이긴 하지만 종래의 唐風文化와는 달리, 당풍문화를 토대로 한 문화의 일본화가 진척되어 國風文化가 꽃을 피우게 된다. 국풍문화는 당풍문화를 일본적으로 소화시켜 생겨난 귀족문화로서, 그 특색은 수도인 쿄오토에 사는 귀족들의 생활을 반영하여 우미·화려하긴 하지만, 시야가 좁고 매우 감각적인 것이었다. 

국풍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일본문학이었으며, 그 기초가 된 것은 바로 카나문자의 발명이었다. 카타카나는 한자의 획에서 생겨난 것으로, 주로 승려들 사이에서 발달했으며, 히라가나는 한자의 초서에서 발달한 것으로 처음에는 여자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女手라고도 불렸다). 카나는 8세기말경부터 구체화되었지만, 이것에 의해 일본인들의 생활감정을 자유롭게, 또한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궁중에 출사한 교양있는 여자들이 이 카나문자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모노가타리(物語=일종의 소설), 수필 등에서 걸작을 남기고 있고, 또 만요오슈(万葉集)이래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던 와까(和歌)가 복권되어 유행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문학 항목 참조) 

헤이안 중기 이후 후지와라씨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계급들이 쿄오토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을 때, 지방에서는 새로운 계급층인 무사들이 세력을 다지고 있었다. 이들은 지방의 토호나 부농들이 자기의 토지를 지키고, 자기 영지내의 농민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이 필요해짐에 따라 생겨난 계층이다. 이들 무사들은 유력한 호족을 중심으로 단결하게끔 되어 무사단(武士團)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 겐지(源氏)와 헤이지(平氏)였다. 

11세기 중엽, 후지와라씨들의 권력이 약해진 틈을 노려, 시라까와(白河)천황은 상황이 되어 원정정치를 펴면서,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그 후 12세기 중엽 상황과 천황의 대립이 생기자 겐지는 상황측에서, 헤이지는 천황측에서 싸웠다.(호오겐·헤이지의 난) 무사들은 이를 계기로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는 정치의 실권을 잡고, 1167년에 태정대신에까지 올라 平氏들의 권력은 극에 달했다. 平氏들의 권력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고시라까와법황(後白河法皇)은 겐지세력과 결탁,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平氏들을 전멸시키고, 源氏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5. 카마쿠라 시대 (謙倉 時代) 

平氏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1192년 조정으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되고, 카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하여 무사정권을 수립했다. 카마쿠라 막부는 이후 약 140년간 지속되는데, 이 기간을 카마쿠라 시대라고 한다. 이 때부터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이 일어날 때까지 700여년간 무사들에 의한 군사독재정치가 지속된다. 

카마쿠라막부의 성립은 종래의 귀족정권에 대해 무사가 독자적 정권을 가지게 됨을 의미하며, 이는 장군과 그 부하(고케닌=御家人이라고 함)가 토지를 매개로 맺은 주종관계를 그 기초로 하고 있으며, 막부는 그중 유력한 자를 슈우고(守護)·지토오(地頭)로 임명하여 전국적 지배를 실시했다. 하지만, 정권의 구조 자체에는 고대적 성격이 남아 있었고, 쿄오토에는 천황과 귀족들의 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마쿠라 막부는 봉건제도 형성의 한 단계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즉, 카마쿠라 시대는 公·武 2중정권의 시대였던 것이다. 

요리토모가 죽자, 그의 처인 마사코(政子)의 친정인 호오죠(北條)씨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고, 싯켄(執權) 정치를 하게 된다. 

13세기 후반,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원정(1274, 1281)은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두 번 모두 태풍의 덕택으로 여·원 연합군을 물리치긴 했지만, 약소 고케닌들의 재정적 부담이 가중되어 불만이 누적, 막부의 세력을 따르지 않게 되고 막부의 세력은 현격히 약화되었다. 이 틈을 노려 고다이고 천황은, 카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다. 

이 시대 정치의 2중성은 문화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전히 전통적 귀족문화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신흥 무사계급이 갖는 실질적이고 강건한 기풍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생겨나고, 또 무사계급은 고전문화를 받아들여 무가의 독자적인 문화도 창출해 냈다. 그 경우, 문화의 창조에 민중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점과 송나라 문화의 영향이 강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대는 전란이 계속되는 불안한 세태였기 때문에, 무사나 백성들은 종교에 귀의하는 경향이 강했고, 그리하여 새로운 불교가 계속해서 생겨났다. 그것은 헤이안 시대의 불교가 엄격한 계율이나 학물을 중요시 한 것과는 달리, 알기 쉽고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신란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기만 하면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정토진종을 열고, 니찌렌은 남묘호오렝게쿄오를 외우면 모든 사람은 구원받는다는 일련종을 개창했다. 또한 중국에서 들어온 선종은 무사들 사이에 널리 유행했다. 좌선을 통해 정신을 단련시키는 선종의 엄격함이 무사들의 심정과 일치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교의나 경전을 갖지 못하고 있던 일본 고유의 신도도 이 무렵, 이세신궁의 신관이 불교 등의 교의를 참고로 해서 신도의 이론적인 기초를 정립할려고 했다. 


 6. 무로마찌 시대 (室町 時代) 

1334년, 고다이고천황은, 천황 중심의 정치를 부활시켰다. (建武의 중흥) 그러나 그것은 고대적인 천황과 귀족정치의 이상을 쫓는 것이었고, 무사계급의 요구나 의향을 무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무사들의 불만을 샀다. 그중 가장 유력한 무사였던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반란을 일으켜 쿄오토로 쳐들어 가자, 천황은 요시노(지금의 나라 현)로 도망쳐 버렸다. 

1336년, 타카우지는 쿄오토에서 새로운 천황을 옹립하고(북조), 1338년 정이대장군이 되어 쿄오토에서 막부를 개설했다. 이 아시카가막부는 타카우지의 손자인 3대 장군 요시미쯔가 쿄오토의 무로마찌에 화려한 저택을 지어 그곳을 막부로 이용했기 때문에 무로마찌막부라고 하고, 이 시대를 무로마찌시대라고 한다. 

한편, 요시노로 도망간 고다이고천황은, 거기에서 조정(남조)을 세웠기 때문에 두 개의 조정이 대립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 시대를 특히 남북조시대(1336-1392)라고 부른다. 

무로마찌막부는 카마쿠라막부보다도 장군과 무사의 유대가 약했기 때문에, 유력한 슈우고는 자신의 소유지를 확장하고, 군사력을 양성, 그 지역을 지배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슈우고를 슈우고 다이묘오(守護大名)라고 한다. 

카마쿠라시대 말기부터 왜구가 한반도와 중국에 걸친 해역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요시미쯔는 그것을 단속하여 중국의 명왕조와 정식 무역을 개시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1467년, 8대 장군 요시마사의 때, 장군의 후계문제를 놓고 무사들은 두 파로 나뉘어, 쿄오토를 중심으로 전란이 11년간이나 계속되었다(오오닌의 난). 이 싸움으로 말미암아 장군의 힘이 약화되고, 장원제등이 질서가 파괴되었다. 그리고 실력만 있으면, 신분이 아래인 자가 윗사람을 제거하고 지배자가 된다고 하는 하극상의 사회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가 100여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시대를 전국시대라고 하고, 이 시대의 새로운 지배자들을 센고쿠다이묘오(戰國大名)라고 한다. 

무로마찌시대에는 농업의 기술이 발달하고, 물레방아가 사용되어 벼농사 뒤에 보리를 심는 이모작도 널리 행해지게끔 되었다. 농민은 각 촌락마다 회합을 열어 농사기술이나 세금(年貢)등에 관해 상담했다. 각 촌락마다의 유대가 강화된 농민들은 서로 단결하여 막부에 세금을 경감시켜 줄 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무기를 들고 싸우거나, 전당포나 양조장등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것을 쯔찌잇키(土一揆)라고 한다. 또 잇키는 종교적인 것도 있었다(一向一揆) 

센고쿠다이묘오는 무기 등을 조달하기 위해 상공업자를 자신의 영지에 모아서 보호했기 때문에, 상공업도 발달했다. 상품유통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각지에 시장이 서고, 운송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대상인들도 증가했다. 또 상인이나 기술자들의 동업조합인 자(座)도 전국적으로 결성되고, 각 지방의 특산품도 생산되게끔 되었다. 

무로마찌시대는 막부가 쿄오토에 있었기 때문에, 무사다움과 귀족적인 것이 융합되어 새로운 무가문화를 창조했다. 그것은 중국의 원·명조의 문화나 선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간소하면서도 깊이있는 문화였다. 또 중앙의 문화가 지방에까지 퍼져서 각지에 민중의 문화가 생겨났다. 

건축물로는 장군 요시미쯔가 쿄오토의 키타야마(北山)에 지은 은각이 대표적인 것이다. 특히 은각은 쇼잉즈꾸리(書院造)라고 하는 선종의 양식으로, 쇼잉즈꾸리의 건물에는, 방 안에 토코노마(床の間)나 치가이다나(違い棚)가 있고, 타타미를 깔고, 방과 방사이에는 후스마나 아카리쇼오지(明障子)로 구분하고 있다. 이 양식은 점차 무사들의 주택에 사용되게 되고, 현재의 일본주택 건축의 원형이 된 것이다. 또 정원은, 무로마찌 초기에는 금각사처럼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것이었으나 차츰 자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카레산스이(枯れ山水)라는 양식으로 바뀌어갔다. 이 양식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류우안지(龍安寺)의 정원이 유명하다. 이것은, 흰 모래를 깐 곳에 바위를 배치한 것으로 선종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말해진다. 

회화에서는 송·원나라에 성행한 수묵화가 전해져서 발달하고, 선승인 셋슈우(雪舟)처럼 독자적인 일본적 수묵화양식(산수화)을 창조해낸 화가도 있다. 

전통예능방면에서는, 간나미·제아미부자가 그 당시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던 소박한 연극을 노오가꾸(能樂)로 완성시켰다. 노오가꾸라고 하는 것은, 주역은 가면을 쓰고, 화련한 의상을 입고 요오쿄쿠(謠曲)에 맞추어 춤을 추는 가무극으로, 독특한 상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다. 노오가쿠와 함께 공연하는 쿄오겡(狂言)은, 노오가쿠와는 대조적으로, 가면을 쓰지 않고, 수수한 복장으로 하는 회화극으로, 인간의 어리석음과 천박함을 익살스럽고 사실적으로 연출한다. 이 노오가쿠와 쿄오겡은 이 시대의 연출형식이 그대로 이어져서 공연되고 있다. 

7. 아즈찌 모모야마시대 (安土·桃山時代) 

중세유럽에서는 봉건제도와 카톨릭교회가 각각 속계와 정신계에 있어서 강력한 지배력을 갖고 있었으나, 십자군·르네상스·종교 개혁·지리상의 발견 등에 의해서 그 지배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의 배경에는 상공업자등의 도시시민과 자영농민 등의 신흥세력의 대두가 되었다. 유럽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절대왕정의 경향을 강화하고, 활발한 지중해무역을 통하여 동양의 향료, 차, 비단, 약품의 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15세기 중반 오스만 터어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루트를 개발해야만 되었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은 희망봉의 발견과 인도 향로 발견에 성공, 16세기에는 동쪽 항로에 의한 무역루트를 장악했다. 한편 스페인은 콜럼부스의 서인도제도 발견,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로 개척 등 서쪽 항로로 필리핀에 도달, 1571년에는 마닐라를 점령하여 동양무역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와같이 동서로 부터 닥쳐오는 유럽 세력의 동양 진출이, 드디어 1543년 2명의 포르투갈인이 큐우슈우 남방 타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함으로써 일본에도 닥쳐왔다. 그것은 결코 우연한 표착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유럽인의 내항과 함께 총의 전래, 기독교의 전파가 일본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으로 주목해야 될 사항이다. 

오오닌의 난 이후 계속된 전란의 시대는 16세기 후반이 되자 비로소 통일의 기운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선두 주자가 바로 풍운아 오다 노부나가(識田信長)였다. 그는 센고쿠다이묘오의 한사람이었으나 차례차례로 다른 다이묘오를 복속시키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는 1543년 타네가시마에 전래된 조총을 국산화하고 대량생산하게 하여 소총부대를 편성, 재래의 전투양식을 바꾸게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1573년, 노부나가는 쿄오토로부터 장군을 쫓아내고, 무로마찌 막부를 멸망시키고, 아즈찌(安土)에 자기의 거성을 짓
초록색 배경은 하나님 나라의 계절 대표색깔 입니다

Jay Johnston, Christianity